거품이 다르고, 향이 다르고, 온도가 다르고 …
상갓집에서 종이컵에 따라 먹는 맥주와 바에서 차가운 글라스에 마시는 맥주, 어느 쪽이 맛있을까. 맥주는 온도에 민감해 종이컵보다 열전도율이 낮은 글라스에 따랐을 때 더 맛있다(물론 분위기도 중요하다). '유럽 맥주 견문록'을 쓴 '비어헌터' 이기중 전남대 교수는 여기다 "종이컵은 마찰력이 커 맥주를 따를 때 과도한 거품이 만들어져 맛의 균형을 깬다. 또 컵 크기가 작아 탄산이 빠져나가는 산화 속도도 빨라 맛이 빠르게 변질된다"고 덧붙였다.
외국의 이름난 맥주 회사들은 맥주 종류별로 전용잔까지 만들어 최상의 맛을 내려고 애쓰고 있다. '독과점의 지위를 만끽하며, 설렁설렁 만들어 파는' 국내 맥주회사와는 역시나 차원이 다르다. 전용잔은 최상의 온도를 맞추고, 특유의 향을 살리면서, 풍부한 맛을 더한다. 외국 유명 맥주 8개를 골라 각각의 전용잔에 따라 마셔봤다. 맛이 확실히 다르다!
# 다양한 맥주 전용잔의 세계
▲플루트(Flute)-필스너(Pilsner)형:필스너는 라거 계열의 대표적 맥주. 길쭉한 잔은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풍부한 탄산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를 잘 표현해 시각적인 풍미와 고유의 향를 더한다. 체코의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이 대표적.
▲플루트(Flute)-바이젠(Weizen)형:가운데가 좁은 형태로 잔 입구에 거품을 한데 모아 특유의 향을 살린다. 독일의 에딩거 바이스비어(Erdinger Weissbier)가 대표적.
▲실린더(Cylinder)형:약한 탄산과 부드러운 맛을 지닌 필스너 계열에 어울리는 잔이다. 곧게 뻗은 잔은 거품보다 맥주를 쉽게 마실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독일 맥주 벡스(Beck's)가 대표적.
▲텀블러(Tumbler)형:흔히 벨기에 밀 맥주인 호가든(Hoegaarden) 잔으로 잘 알려진 텀블러 형태의 잔이다. 다른 잔에 비해 유리의 두께가 두꺼워 손의 온도가 전해지는 것을 막아 맥주가 차갑게 유지되도록 돕는다.
▲튤립(Tulip)형:튤립처럼 생긴 주둥이가 향을 모아줘 코로 향을 즐기기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특유의 향과 맛을 지닌 맥주에 어울리는 잔이다. 벨기에 맥주 듀벨(Duvel)이 대표적.
▲머그(Mug)형:독일 옥토버 페스트를 상징하는 가장 일반적인 잔이다. 손잡이가 달려 손의 온도가 전달되지 않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실 때 적합하다. 독일 맥주 파울라너 뮌헨(Paulaner Munchen)이 대표적.
▲고블릿(Goblet)형:고블릿은 받침 달린 잔이란 뜻이다. 고블릿 잔은 수도원 계열의 맥주와 잘 어울린다. 잔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면서 마시는데, 차가울 때보다 미지근할 때 오히려 맛이 더 좋기 때문이다. 벨기에 수도원 계열 맥주 레페(Leffe)가 대표적.
▲파인트(Pint)형:파인트는 원래 용량을 세는 단위였으나 명칭으로 굳어졌다. 이 잔은 이상적인 대류 흐름을 만들기 위해 유체역학적으로 제작됐다. 영국의 흑맥주 기네스(Guinness)가 대표적.
다 갖출 수 없다면 기본 3가지 정도 …
# 맥주잔, 이렇게 골라라
맥주별로 전용잔을 모두 갖출 수는 없지만 맥주의 특성을 고려해 적당한 잔을 몇 개만 고르면 전용잔 못지않게 맛을 즐길 수 있다. 라거라고 불리는 황금 빛깔의 맥주는 길고 유연한 곡선을 가진 잔(예를 들어 '실린더형')에 마시면 본래의 맛을 살릴 수 있다. 거품을 풍부하게 만들어 산화를 막아 주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기포를 감상하는 재미는 덤이다. 버드와이저, 아사히, 하이네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맥주도 여기에 속한다.
적갈색을 띠고 곡물향 또는 과일향이 나는 맥주는 와인 잔과 비슷한 잔을 고르면 된다. 고유의 향을 머금고 있는 거품을 잔 입구에 모아줘 맥주가 가진 특성이 잘 드러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레페, 듀벨 등이 적합하다.
색이 뿌옇고 신맛이 느껴지는 향을 가진 맥주는 손잡이가 달린 머그잔을 이용하면 좋다. 머그잔은 손의 온기가 맥주에까지 전해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맥주는 효모가 풍부해 온도가 올라가면 본래의 맛을 잃는다. 호가든, 에딩거 바이스비어 등 대부분의 밀 맥주가 여기에 속한다.
전용잔은 마트의 전용잔 패키지 행사나 인터넷 장터 '중고나라'에서 전용잔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3가지 형태의 잔만 갖추면 다양한 맥주의 풍미를 훨씬 더 살리면서 맛볼 수 있다.
# 국산 전용잔, 볼 수 있을까
지난 설을 앞두고 OB맥주는 전용잔이 포함된 일본 맥주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 선물세트를 처음으로 선보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맥주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인데도 국내 맥주 회사들은 전용잔 개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OB맥주는 맥주 특성에 맞춘 잔이 아니라 단순한 마케팅용 전용잔을 만들고 있다. 이 회사 한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맥주를 잔에 따라 마시지 않고 캔을 사서 바로 마시는 비율이 높아 전용잔 개발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하이트 진로나 새롭게 맥주 시장에 뛰어든 롯데주류도 전용잔 개발 계획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맥주 전문가들은 "점차 까다로워지는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맥주를 다양화하는 것은 물론 맛을 특성화하기 위한 전용잔 개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맥주회사 관계자 여러분, 국산품 애용하게 좀 도와주소서!
글·사진=박종호 기자·송병철 인턴기자 nleader@busan.com
|
